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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좀 정리하려는 차원에서 적어보는 글.



#. IT 분야에서 구현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특정한 제품(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의 구현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게 된다. 질문 자체는 구체적일 수도 있고 추상적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묻는 것은 비슷하다. "이것이 구현 가능하느냐?" 이러한 질문에 대해 나는 대체로 대동소이한 맥락에서 대답했다. “시간과 돈과 사람이 있으면 뭐든 가능하다”라고. (물론 대부분의 경우 마지막의 '사람'은 날 의미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저러한 질문과 대답의 과정에 회의감이 들고 있다. 딱히 질문자에게 문제가 있기 보다는(그들은 단지 내게 일거리와 시간과 돈을 주고, 나는 마찬가지로 시간과 돈의 범위 내에서 그들에게 결과물을 돌려줄 뿐이니까. 이 과정 자체에 불만은 없다) 그러한 질문을 듣게 되는 나의 상황이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간단히 그 회의감의 정체를 문장으로 적어보자면,

"뭐든 가능하다"라는 즉답을 내놓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를 만난 적이 있는가?

아니, 위 문장은 틀렸다. 쉬운 문제만 마주친 인생이라고 회의감이 들 일은 없겠지. 회의감의 정체 쪽으로 포커스를 옮겨 다시 문장을 떠올려 보자면,

결국 난 "뭐든 가능하다"라고 즉시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다시 말해 어느 정도 숙련된 개발자라면 누구나 구현이 가능한 응용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는 개발자였구나, 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시스템을 유지보수하거나 하면서 10여년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이력을 되돌아보면 사실 10여년이 세월이 쌓였다고 할 만한 그 무엇을 찾긴 어렵다. 비슷하게 시간을 보낸 개발자들 가운데서 프로그래머로서의 능력을 묻는다면 뭐 그래도 할 만큼은 한다, 고는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 능력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아마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다. 개발자의 지식과 능력은 일종의 융복합 학문 같은 것이라서  "JAVA : 상급" 따위의 한 마디 문구로 표현하기 어렵다. 아마 쓸만한 개발자 한 사람의 지식과 능력에 대해 논하자면 그 분량은 짧은 에세이 한 편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 되지 않을까.

이력서에 어떤 내용이 남든지, 그런 것은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다. 내가 이력서를 어떤 내용으로 채울지 고민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면 지금 이런 종류의 생각을 하지도 않을테니까. 이력서에 몇 줄 남을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느끼기에 지금까지 해 온 일들에 대한 이정표같은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마음 아프다고 해야겠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달까, 뭐 그런 느낌.



#. 나는 남들 앞에서 대놓고 잘난척을 하거나 젠체하거나 생색내거나 하는 것을 저어하고 부끄러워하는 성격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자랑스러워 하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가야 할 성격의 일을 하고 있다면 이런 종류의 자뻑(?)은 어떤 면에서는 필수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야!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거라고! 라고 외치고 다니기라도 해볼까.

... 잘난척이 문제가 아니라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려나.



#. 현재 당면한 문제는 회의감보다 무기력증인 것 같긴 하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