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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와 초코렛을 사다.

pda하고 씨름질을 하던 저녁, 시로와 영화약속을 했다.


거의 1년만에 만난 시로는, 조금은 '난 아가씨에요'하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결혼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22세의 여자에겐 좀 이른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생각을 말로 바꿔 입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행복의 조건이란건 아주 개인적인 것이고, 때로는 터무니없기도 한 것이니까. 그냥 평소처럼 마지못해 미소짓는 표정을 보여주며 '잘 될거야'라고 말해주는 수 밖에.


시끄러워 정신이 들었다나갔다 하는 식당에서 보리밥을 먹고, 이런저런 시덥잖은 얘기를 하고, 영화를 보았다. 영화 제목은 구세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영화는 엉망. 허한 웃음을 뿌리며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도대체 이 영화에서 날 구원해 줄 구세주는 어디에. 난 영화를 볼 때 스크린에서 거의 눈을 떼지 않는 편인데, 혹시나 시로도 영화를 재미없어하면 같이 나갈까 하는 생각에 옆자리로 눈을 돌렸다. 시로는 마냥 재밌기만 했는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애원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어도 마찬가지였겠지.


쿼바디스 도미네.


영화는 어떻게든 끝났고, 그리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뭔가 이런저런 얘기를 더 했었던 것 같고, 머리를 몇 번인가 쓰다듬어줬고, 지난 얘기를 하려다가 그만두고, 시로를 전철역까지 배웅해서 보냈다.


그리고 까르푸에 맥주와 초코렛을 사러 갔다. 맥주는 당연히 기네스. 초코렛은 아무거나 최대한 커다란 녀석을 사면 되겠지. 기네스는 여전히 3900원의 가격표를 달고 있었지만, 지난 여름 초코렛 코너를 뒤덮고있던 까르푸 자체생산 싸구려 밀크 초콜렛은 다 어딘가로 가버리고, 아몬드 초코렛과 뻥튀기쌀 초코렛(이따위것을 크런치 초코렛이니 하는 멀쩡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으면 한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아냐, 오늘은 헤이즐넛이나 아몬드따위 들어있지 않은 초코렛이 좋겠어. 결국 고른 것은 허쉬의 1/2 파운드짜리 덩어리 초콜렛과 젠느.


대체 한국에서는 맥주건 초코렛이건 왜 이렇게 비싼거야. 졸업하면 이것저것 관두고 차라리 외국으로 나가버릴까.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엔 매일매일 기네스와 싸구려 브랜디를 마시며 초코렛을 먹는거야. 몸에서 온통 카카오와 연유, 삭은 포도와 타서 눌어붙은 카라멜의 냄새를 풍길 때까지. 그때 쯤이면 뭔가를 시작할 마음이 들 것 같기도 해.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시로와 실없는 문자질을 하고, 결국 책상 앞에 앉아 앞뒤 문맥도 파악할 수 없는 외국어의 문장 더미에 시선을 굴려대며, 또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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