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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은 농협에 뭘 하러 간걸까

※ 글을 써놓고 보니 최근의 농협 사태를 노리고 쓴 거 아니냐고 물어보는 분이 계신데 ...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IT 업계의 한 사람으로써 의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농협 사태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지난 주말에 사가와 잇세이의 자전적 논픽션인 “악의 고백”이 문득 읽고 싶어져서 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공립 도서관에 이런 책이 버젓이 있을 수 있다는 건 문학계의 크나큰 영광입니다. 어텐션!

 

일종의 습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책을 빌리러 갈 때 일부러 빌릴 책을 한 권(많아야 두 권)만 정해두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편이다. 평소에 읽고 싶은 책은 많지만, 미리 읽을 책을 여러 권 정해두고 도서관에 갔다가 막상 서가에 서면, 다른 책이 눈에 들어와서 ‘무엇부터 먼저 빌려야 할까’하고 고민을 하다가 일전에 읽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책을 읽을 마음까지 달아나버리곤 한다. 이를테면, 나는 마음 속에 ‘이러이러한걸 해야지~’라고 기록한 메모지를 들고 있다가, 메모지에 지나치게 항목이 많아지면 이내 짜증을 내고 메모지를 구겨 어딘가로 던져버리는 성격이다.

계획적인 독서를 설파하는 사람이라면 내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저런 식으로 눈에 띄는 책을 무계획적으로 빌린 뒤에 약간 방심한 상태로 책을 읽는 것을 즐긴다. 내 눈 앞에 쌓여있는 이 책의 목록을 다 먹어치우고 나면 내 삶은 충만해지고 뭔가 달라질거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기보다는, 그냥 멍청하고 공허한 뇌에 문장들을 우겨넣다가 미처 신경쓰지 못한 한 문장에 쿵. 하는 감동이나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 내 나름의 글읽기의 즐거움이다.

서설이 길었는데 - 여튼 그런 사정으로 논픽션 한 권을 빌리러 갔다가 대출 최대 한도인 다섯 권을 채워서 빌려오고 말았다. (사실은 거의 매번 이렇다) 대출 한도가 늘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도서관 나름의 사정도 있을테니 그런건 넘어가자.

 

오늘 이 시간까지 스탠드를 켜 놓고 읽고 있던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모음집인 “비밀의 숲”이다. (원제는 “村上朝日堂” 일려나… 잘 모르겠다. 노르웨이의 숲을 염두에 둔 작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에세이에 비밀의 숲 따윈 나오지 않는다) 이 에세이집에는 러브호텔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해당 에세이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과 제보가 이어지면서 온갖 희한한 러브호텔 이름이 등장한다. 읽다보니 그 대목이 너무 웃겨서 러브호텔의 이름들만 여기 옮겨본다. (사실 처음에 등장하는 호텔 이름들은 그다지 웃긴 이름들은 아니다만…)

  • 티라미스
  • 투웨이Two-way
  • 크리에이티브 룸 SEEDS (창조의 방 – 씨앗을 뿌려라??)
  • 휴먼스 웰 (하루키 : 인신공양을 드리던 잉카의 바닥 없는 우물이 생각나는데…)
  • 미쓰코시 (일본의 유명 백화점. 한국으로 치자면 ‘신세계’ 쯤?)
  • 인간관계 (하루키 : 간판을 보고 고민할 것 같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처럼)
  • ~라는 이유로
  • 시간 죽이기 (하루키 : 영화 <오후의 정사> 같군요)
  • 고시엔 (전국 고교야구대회가 열리는, 일본의 야구장)
  • 시요카 (‘紫陽花’, 원래대로라면 훈독으로 ‘아지사이’라고 읽지만 일부러 음독으로 ‘시요까’라고 읽는다고 함. 뜻은 ‘할까?’)
  • 아소코 (‘거기’라는 의미)
  • 45º (하루키 : 아마 각도를 뜻하는 것이겠죠)
    ; 실제 이름은 ‘크리에이션 45º’이고, 45도로 기울어진 모양의 대지에 건축되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π = 3.14
  • 샤르망 69 (charmant, ‘매력적’이란 뜻의 불어)
  • 한낮의 수달 (하루키 : 여기까지 와서 잠만 잘거야?)
  • 노란 고래
  • 핑크 코끼리
  • 요정이 잃어버린 초록 시간
  • 3학년 2반 (하루키 : 준비물도 마련되어 있으려나)
  • 공부방
  • 초밥집 옆
  • 늘 가던 곳
  • 무인도
  • 농협
    ; 방이 만실일 경우에는 ‘풍작’, 방이 비어 있을 경우에는 ‘흉작’이라는 팻말을 걸며, 호텔의 입구에는 송아지 두 마리의 대형 모형이 놓여 있다고 한다.
  • 무 (물론 채소. 입구에는 무가 교차되어 있는 도안의 간판이 세워져 있다고)
  • 멋쟁이 공화국 & 하이칼라 공화국 (서로 다른 두 개의 호텔이 마주하고 있다. 하루키 : 어느쪽으로 들어가지 하고 한참 고민하겠네요)
  • 덕쟁이 고양이 (맨 앞에 ‘변’이라는 간판 글자가 떨어져 있었다고. 일본어 원문에는 ‘きまぐれ(키마구레)’에서 앞글자가 빠져서 ‘마구레 네코’라고 씌어 있었을 듯)
  • 멘델의 법칙
  • 왕장王將
  • 고릴라의 꽃다발 (벽면에 고릴라가 붙어 있다고 한다)
  • 피라미드의 불가사의
  • 당근 & 양상추 (하루키 : 그럼 호텔을 또 지으면 다음에는 ‘토마토’나 ‘오이’라고 짓겠군)
  • 친척 (하루키 : 이런 이름은 너무나 초현실적이어서 어떻게 코멘트를 할 수가 없다)
  • 단짝
  • 사드 후작의 저택

 

하루키는 역시 에세이가 제맛.

 

p.s:개인적으로는 ‘농협’이 최고였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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