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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열두시가 넘어서야 침대에서 눈을 떴다. 잠시 이불 속에 머무른채로 다시 눈을 감았다. 멍하니 누워 있었다. 수면 직후의 나른함이 머리 속에서 가시고, 해야할 일들이 머리 속에 차르륵 떠올랐다. 하지만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를 두들기며 무언가에 집중할 기분은 아니었다. 핸드폰을 집었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차피 메시지 따위 들어올 일도 없지만.

창밖의 하늘은 회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눈이 올 것 같은 구름은 아니었지만, 하늘의 대부분이 어두운 색의 구름으로 가려 있었다. 별로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푸샵을 하고,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몸은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그리고 점심을 간단히 먹었다. 두부 한 조각, 삶은 쭈꾸미, 김치 등을 먹고, 세수를 했다. 문득 가방 수선을 맡겨야 할 일이 생각났다. 진한 갈색, 부드러운 가죽의 본체에 나일론 끈이 달린, 세로로 약간 긴 숄더백 스타일의 가방이다. 이 가방을 사용해 온지도 벌써 6년. 끈에 연결된 가방의 가죽이 다 떨어져 얼마 전에 수선을 받았었다. 하지만 가방에 달린 끈이 수선하기 어려운 형태로 본체에 고정되어 있어서, 그럭저럭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식으로만 고쳐져서 돌아왔었다. 그래서 이번엔 좀 더 튼튼히, 라는 말을 덧붙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궂은 검은 회색이었고, 도저히 문 밖으로 발을 내밀 기분이 아니었다. 노트북을 켜고 어제 다운받은 '日本の形' 시리즈를 봤다.

침대 위에서 뒹굴며 '지식인의 두 얼굴'을 훑어보다가 집을 나선 것은 세시쯤이 되어서였다. 창 밖이 잠시 밝아진 것을 알아채고 겨우 밖에 나설 마음이 든 까닭이었다. 하지만 겨우 옷을 꿰고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다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할 수 없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의 현관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와서 전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방 속에는 책이 들었고, 레몬색 후드 점퍼에는 새로 산 아이팟 터치가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걸로 반나절은 견딜 수 있겠지. 괜찮아.

불경기라지만 백화점은 사람이 가득했다. 한산했다면 옷이라도 좀 볼 생각이었지만, 막상 백화점에 가보니 멍청한 생각을 했구나 싶었다. 결국 그냥 가방만 맡기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쌈지 매장에 '튼튼히'라는 말을 강조하며 가방을 맡기고, 한 손에는 책을, 한 손에는 아이팟을 든 채로, 루시드 폴 3집의 가사를 흥얼거리며 백화점에 가득찬 사람들 사이를 지나쳤다.

그리고 돌아왔다. 이것저것 뭔가를 했지만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주말, 사람으로 가득한 백화점에서 홀로 책과 아이폰을 손에 들고 뭔가를 흥얼거리던 남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라는 문장을 적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외에는.

...

끝없이 불안하다.
난 아직도 준비가 안 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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