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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컴퓨터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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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난 21세기가 되면,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서처럼 머리 속에 무선통신 모듈을 심거나 생리-전기적 인터페이스가 등장한다든가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오늘날의 스마트폰 환경 정도는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막상 2001년이 되었을 때에는 기술이 그 정도까지 발전하지는 않았고, 그 즈음 난 도시바의 리브레또 M3와 Palm M100을 사용하고 있었다. 난 경제적인 사정 덕에 다양한 기기를 사용하지는 못했었지만, 그때에도 '어디서나 꺼내서 사용할 수 있는 정보기기'를 좋아했다. 어디에서나 항상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면,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인류의 정주 문명(사실 인류의 전체 역사에 비하면 그리 긴 기간은 아니지만)이 어떤 형태로 변할 것인가에 대해 상상했다. 디바이스를 들고 정보의 초원을 헤매이는 유목민의 삶을 상상하며, 그 모습에 나를 대입해보곤 했다.


이러한 기억이 문득 다시 떠오른 것은, 어느날 문득 전철에 올라 각자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였다. 내가 과거에 상상했던 환경은 현실로 다가왔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이 헤매이는 정보의 초원은 앵그리버드와 카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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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컴퓨터의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떠올렸던 프론티어들은 아마, 단순히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컴퓨터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인이 컴퓨터를 소유하고 정보를 그 컴퓨터에 담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보가 공유되고 이동될 수 있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수단이 필요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외부 기억 디바이스, 네트워크, 포터블 디바이스... 구체적인 형태의 디바이스를 상상하지는 않았더라도, 아마 개인 컴퓨터의 꿈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컴퓨터를 넘어, 정보에 대한 개인의 권리-개인이 정보를 생산하고, 생산한 정보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에 대한 꿈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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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과는 달리, 오늘날 사람들에게 현실로 다가온 진정한 개인 컴퓨팅의 시대가, 쉽게 사람들의 삶을 근본부터 뒤집어놓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기득권과 그 바탕이 되는 정주 문명은 여전히 공고하고, 정보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며 투쟁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핵티비스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공격당하는 신세다. 


사람의 삶은 단순히 배경이 되는 기술적 환경이 변화한다고 해서 극적으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2000년, 나는 전철이나 도서관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그 글을 정리해서 홈페이지나 BBS에 적곤 했었지만, 2012년의 나는 에버노트로 글을 쓰고 그 글을 내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노트북과 자동으로 동기화하여 정리하며,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자동으로 SNS에 그 글의 링크를 올린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범위는 좀 더 넓어졌고(이제는 화장실에 가더라도 스마트폰만 들고 가면 된다), 글을 잃어버릴 염려도 줄어들었고(저장 버튼을 누르고 5분이면 에버노트 서버 어디엔가 저장된다), 심지어는 이제 데스크톱의 OS가 무엇인지조차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쓴다'는 행위를 위해 디바이스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속성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내가 에버노트의 편리성과 혁신성에 감동하고 신기해한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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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컴퓨터의 프론티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각자 PC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람들의 손에 쥐어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며, 세상의 다음 단계를 꿈꾸고 있을까.


혹은 지금의 세상에 '기술적으로' 만족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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