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카드 호감

얼마전에 아는 분이 현대카드 영업을 뛰고 있는 관계로다가 카드를 하나 발급받았었다. 발급받긴 했지만 굳이 내게 유리한 조건이나 뭐 이런 것도 없고, 이미 쓰고 있는 카드도 있는데다가, 현대카드를 싫어하기까지 해서(지금까지의 인간경시/과소비조장 광고의 탓이 크다) 발급받은 카드는 서랍 속 깊은 곳인지 침대 밑 어두운 공간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처박혀서 빛도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방금 메모를 살펴보다가 카드를 발급받았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대체 메모조차 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를 걱정하기 이전에, 쓰지도 않는 카드를 만들어놓고 개기는 성격이 아니라서 탈회처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기분이 우울해졌다. 한 번 쓰여보지도 못한 채 일생을 마치게 될 카드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라, 예전에 삼성카드를 해지하면서 경험했던 짜증나는 서비스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어차피 제멋대로 생각하는 동물이라, 카드의 입장따위 고민해줄 여유는 없다. 또 얼마나 많은 전화를 해야 할까. 현대카드 영업점은 어디에 있을까. 무슨 서류가 필요할까. 등등. 마음 속에서는 먹구름이 계속 피어올랐다.

구글에서 현대카드 해지를 검색해보았지만 어림없었다. 카드사가 그런 소중한 정보를 쉽게 검색엔진에 노출할까보냐. 어쩔 수 없이 현대카드 ARS로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과는 금방 연결되었다. 해지신청 이전까지야 금방 연결된다는 건 상식이다. 본인 확인 후, 탈회하겠다고 말했더니 해지상담번호로 돌려주겠단다.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전화 수화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현대카드의 갖가지 광고 메시지가 수화기를 통해 귀로 흘러들어오고. 1분 남짓. 연결이 됐다. 생각보다 빨랐다. 지금 오후 한시 막 지났는데 이렇게 빨리 연결될리가 있나. 신기했다. 하지만 아직 긴장을 풀 수는 없다.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탈회를 요청했다. 상담원의 회유 시작. 고객님 이거 다시 발급받으시려면 어렵구요 한 번 사용해보시는게.. 혜택이 어쩌구저쩌구...

부탁받아 만든 카드이고, 제가 이미 사용하는 카드가 있는데다가, 사용하지 않는 카드는 남겨놓질 않는 성격이라서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사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를 숨도 안 쉬고 내뱉었다. 여기서 밀리면 안된다. 2초 정도의 침묵이 이어졌다. 자 뭐라고 말해봐 어서! 삼성카드도 해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야! 현대카드를 못 이길 것 같으냐!

 

"알겠습니다. 탈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이쿠?
전화통화만으로 탈회신청이 되는거였나?

... 검색을 조금 하다 보니, 하도 해지신청때문에 말이 많으니까 금감원에서 카드사에게 태클을 넣어 해지 신청을 간소화하도록 했다는 기사가 눈에 띄긴 했는데, 그래도 ARS에서 본인 확인만 하면 탈회 신청이 가능하다니... 전반적으로 카드사 서비스 응대가 좋아진건지, 아니면 현대카드만 차별화된 서비스(게다가 '해지' 서비스를)를 제공하는건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런 종류의 서비스에 신경을 쓰는 회사를 좋아한다. 회사의 이익에 집중하고 듣기 좋은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는게 아니라, 고객에게 싫은 소리도 적극적으로 듣겠다는 자세랄까. 물론 금감원 덕분에 전반적으로 해지 서비스가 간소화된건지는 모르겠지만(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쓸 의미가 별로 없지만), 그동안 '난 무슨 끝장나는 혜택이 있다고 해도 현대카드는 안 쓸거다'라는 평소의 입장에서 심정적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되었다. 현대카드가 나를 고객으로 유지하는 데에는 실패했더라도, 잠재적인 고객으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5분만에 카드탈회신청을 완료했다는게 스스로도 너무 믿겨지지가 않아 10분에 걸쳐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는 케냘이었습니다. 이상.

 

* 방금 우리은행에서 만든 카드도 하나 해지했는데, 여기는 아예 해지 사유조차도 안 물어보더라. 그럼 그렇지...